일상탈출

영암 월출산 산행기(도갑사편)

시누대 2005. 7. 2. 08:48
 


한줄로 되어 있는 기둥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것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입니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좌측에 매표소가 있다.
그 곳을 지나 계곡을 따라 숲길을 올라가면 먼지를 털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다듬어 주는 해탈문이 있다.
 


도갑사를 해탈문을 가려면 잘 정돈된 돌계단을 따라 가야한다.
 


숲속 돌계단을 따라가면  마음이 평온 해지기도 한다. 
 


숲길 우측에는 공적비가 기다리고 있다.
 


|<해탈문>
1960년에 해체 보수하면서 <도갑사해탈문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1473년(성종 4) 5월 기둥을 세우고 상량한다는 건립연대가 적혀 있습니다.
건축 양식은 조선 초기의 주심포 양식으로, 정면 중안칸은 통로인데 이곳을 거쳐 피안의 세계 대웅보전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중안칸의 창방 위에 '월출산도갑사'라는 현판을 걸어 이 곳이 절의 정문임을 나타내고, 한 칸 안으로 들어서면 해탈문의 현판이 보입니다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은 상량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왕사(王師) 수마가 대시주이고, 대선사 각여(覺如)가 대목(大木), 대선사 의명(義明)이 부대목(副大木)을 맡았습니다.
그 밖에 해명(海明)·성명(省明)·조명(祖明)·해종(海宗), 그리고 지사(持寺)를 맡았던 홍월(洪月)스님 등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기단과 계단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후대에 넓혀져 기단이 두부분으로 된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난간머리에 새겨진 태극무늬는 만다라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공포 위에는 대들보를 올려 보 끝은 외목도리를 받고 대들보 양쪽 끝 가까이에서는 마루 보 끝을 받는 포대공의 첨차가 그대로 우미량이 되어 앞으로 나오는 것을 기둥 위 대들보에서 받아 이것이 주심도리를 받고 있습니다.
해탈문은 맞배집에 엔타시스가 약간 있고 헛첨자를 두고 있으며, 양봉이 안초공형태의 초가지로 되어 있고 우미량을 걸친 것이 특징입니다.
천정은 마루보 중앙에는 포대공으로 된 마루대공을 두고 마루도리를 받으며 마루도리 앞 뒤에서한국에서 보기 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약한 반곡을 가진 소슬합장이 역시 마루도리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도선국사 성보관>
도선국사와 관련이 있는 문화재와 사찰문화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2001년에 개관한 이성보관은 국사의생애와 관련이 있는 설화등을 그래픽 영상으로 항상 상영할 홀과 세미나 실도 갖춰 모든 대중들이 접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있으며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해발 376m)을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도량으로 신라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재 고려시대의 기록은 자료 유실로 알려진 것이 없고 조선 이후의 발자취는 소상히 남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원의 중창은 1456년(세조2년) 수미(守眉)왕사에 의해서였다. 수미왕사는 왕실의 어명을 받들어 국가적 지원으로 966칸에 달하는 당우와 전각을 세웠고, 부속 암자만 해도 상동암, 하동암, 남암, 서부도암, 동부도암, 미륵암, 비전암, 봉선암, 대적암, 상견암, 중견암, 하견암 등 12개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대웅보전을 가는 중앙 통로가 돌계단으로 되어있다.
 


대웅보전 가는길 좌, 우측으로로 가람의 흔적들이 남아 커다란 광장처럼 보인다.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차츰 옛 가람의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1996년 주지로 부임한 범각(梵覺)스님에 의해 '도갑사 성보관'이 건립되는 등 유관기관의 역사적 검증을 거친 제8차 복원불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도갑사의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도갑사의 사라진 가람들이 복원중에 있으며, 손실된 가람들의 크기와 모습에 마음이 슬퍼진다.
이런 과거를 안고서 아직도 고찰로서  이어져 왔음에 도갑사가 해탈에 경지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것들도 일제시대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 더구나 1977년 참배객들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대웅보전과 안에 모셔져 있는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비운의 흔적이 너무 많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석조>
도갑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돌그릇.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석조란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거나 곡물을 씻는 데 쓰는 돌그릇을 말한다. 도갑사의 대웅전 앞뜰에 있는 300년 된 초대형의 고풍스런 석조는 화강암으로 만든 기다란 네모 모양의 통나무배 모양으로 네 귀의 모서리를 죽였으며 거죽의 밑바닥도 반원형으로 돌려 처리하였다.
승려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수 있는 작은 배수구가 있다. ‘강희(康熙) 21년 임술(壬戌)’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인 1682년(숙종 8)에 제작된 석조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길이 467cm, 폭 116cm, 높이 85cm에 이르는 17세기 말의 거대한 석조이다.
 


도갑사 대웅보전 앞 광장입니다.
이른 아침이라 조용하고 관광객이 없고 석조와 오층석탑이 보입니다.





어느 사찰에서나 볼수있는 기와 불사 접수하는 곳 입니다.
쌓여있는 기와로 보아 많은 신도가 있음을 짐작케 하며, 복원될 사찰을 위해서는 아직도...... 
 



<오층석탑>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는 고려초 작품으로 본래부터 지금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언제인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하대석 일부가 없어진채 기단 아래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초층 기단에 5층의 탑신, 그리고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단은 4매의 면석과 2매의 갑석으로 자여져 있으며 각 면에는 우주 및 탱주가 새겨져 있고 갑석 위에 있는 1단의 각형 괴임이 탑신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이고 각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3층까지는 5단이다가 4층은 4단, 5층은 3단으로 점차 줄어들면서 옥개석의 크기에 다라 옥개받침이 개수도 차츰 줄여 나갔습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평평하고 네 귀퉁이의 전각은 밋밋하게 내려오다 끝에서 조금 치켜 올라간 형태를 취하며, 상륜부는 노반과 보주로 이루어졌으나 본래의 것이 아니라 후에 보수한 듯 석질과 색이 다릅니다. 현재 높이는 460cm 라고 합니다.
 



<대웅보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본래의 건물은 광해군 때 중수한 것이지만 1977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전각은 물론 그 안의 석가삼존과 금동의 육과(六光)보살도 사라졌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원형에 충실히 따라 복원되었습니다.
목조로 모신 아미타·석가·약사의 삼세불상을 봉안했습니다.
석가는 현재불, 약사는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하며, 이 삼세불 신앙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뒤에는 삼불회도(三佛會圖)로 1폭에 삼존을 배치한 석가후불화가 걸려있습니다
 



<향다각>
차를 마시는 곳 입니다.
 



<범종각>
범종각은 벽면이 없이 6개의 기둥으로 우진각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범종은 에밀레 종의 표면장식 문양을 그대로 모조하였습니다
 



<세진당>
요사채 입니다.
 



<지혜당>
스님들이 수양을 하는 곳 입니다.
전면입니다.
 



지혜당 후면 입니다.
 



<수미왕사비각>
대웅보전 뒤쪽 빈터에 있는 이 비는 도갑사의 오늘날을 있게 한 중창주 수미대사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서, <월출산도갑사왕사묘각화상비명>이러고 합니다. 방형의 대좌 위에 귀두부를 얹고, 그 위로 비신과 이수를 올린 형식입니다.
대좌 위로 비신이 바로 연결되며 명문은 앞뒤에 모두 새겨졌습니다. 앞면은 수미대사의 생애와 비의 건립연대, 뒷면은 건립에 참여했던 승려와 지방 인사 및 시주자 명단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비의 건립은 1629년(인조 7) 2월에 시작하여 1633년(인조 11) 6월에 완성하였으므로 비문과 극씨를 백암 성총 스님이 손수 짓고 썼습니다.
 



<국사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수선당>
요사채 입니다.
 



<도갑사 중창 계획 조감도>
도갑사의 중창 계획이 매우 큰 사찰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웅보전 좌측으로 약사전이 중창될 자리입니다.
 



문수전, 보현전, 적멸보궁등이 복원될 곳입니다.
멀리 작은 돌무덤이 있는 곳 뒷편에(2번째 연등으로 가려짐)에 허술하게 보관된 삼층 석탑이있습니다.


 



<명부전>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보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본래 수미대사의 중창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1년에 복원된 것입니다.


 






<수선당>
요사체로서 출입이 금지 되어있습니다.
 


수선당옆을 지나면 서조 여래좌상이(보물 제89호) 모셔진 미륵전으로 가는 길이 있다.
또한 월출산에 오르는 등반 코스로서 억새밭-구정봉-천왕봉-사자봉-구름다리-천왕사로 가는 길이다.
 



지나는 길에 루각가 보인다.
이곳이 작은 폭포를 관람하는 곳 이다.
 



이곳이 폭포인지 착각을 할 수 있다.
 



정자에서 바라본 폭포다.
작은 폭포로서 내려 갈 수 가 없다. 
 



이 돌다리를 건너면  가파른 능선에 도갑사의 보물이 있는 미륵전이 있다.
 



<용화문>
용화문은 미륵전 앞에 세워진 문으로 미륵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용화"란 '미륵정토'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용화문은 미륵세계를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습니다
 



<미륵전>
미륵이란 미래에 나타나실 부처님을 이르는 말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아담한 전각입니다
1936년에 조성된 산신탱화와 1986년에 조성된 신중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신중탱화는 제석을 중심으로 무장한 신들이 에워싸고 있는 구도가 일반적이며, 제석은 인도의 대표신인 인드라가 불교에 수용되면서 승격된것입니다.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미륵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300cm로서, 광배와 본존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호는 원만한 모습이며 나발의 머리에 육계가 솟아 있고 눈과 코, 입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광배는 전신을 감싸고 있는 주형(舟形)으로 머리 위와 그 양족에 3체의 화불이 의미해게 새겨져 있으며 머리 위에는 8엽의 연화문이 드러나고 그 주변에 당초문과 화염문이 음양각으로 새겨졌습니다. 대좌는 방형대석으로 하단에 1단의 괴임이 있고 그 밑으로 방향의 중석이 받치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반영하면서도 부분적으로 옷의 문양이나 대좌 등에서 고려적 요소도 많이 지니고 있어 조성시기를 10~11세기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고려초의 우수한 불상이어서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 미륵전 안에 봉안되어 있어 이 불상을 미륵불로 모시고 있는 듯 하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루어 마귀를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취하고 있어 이 불상의 명호는 석가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郡西面) 도갑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암 불상.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같은 돌에다 불상과 광배(光背)를 조각하였다. 나발(螺髮)에 육계(肉)가 크며 타원형 얼굴이다. 도톰한 눈두덩, 넓적한 코, 덤덤한 입에는 미소를 띠고 있다. 투박한 귀는 짧고, 목은 길지만 삼도(三道)는 형식화되었다. 어깨는 넓지만 부자연스러우며 몸의 굴곡도 단순하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팔도 생동감이 없고 조각기법도 둔하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옷주름 몇 가닥을 투박한 선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광배는 주형(舟形)이고 신라의 양식과 달리 곡선미를 찾아볼 수 없다. 두광(頭光)도 홑잎 연화(蓮華)무늬를 표현하였고, 꼭대기와 양옆에 각각 화불(化佛)이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화염(火焰)무늬가 표현되었다. 대좌는 연화대좌(蓮華臺座)로 짐작되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얼굴의 세부표현이 예리하지 못하고 전반적으로 평면성을 강조하였다.
이 화강암 불상을 미륵전에 어떻게 넣었을까? 궁금했다.
아마 이곳에 먼저 보존상태에서 미륵전을 중창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부도전>
다른 산사에서 볼 수 없이 산사 안쪽에 모셔져 있으며 담장으로 잘 보존하고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형태는 종형과 팔각원당형이 있는데 양식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절을 거쳐간 고승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전부 11기의 부도 가운데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것은 영백당(靈栢堂)과 서령당(西嶺堂) 부도뿐입니다
이 부도로 보아 대가람 도갑사의 옛 크기를 다시한번 짐작케 할 수 있다.
 



<도선수미비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총 높이 513cm 인 이 비의 정확한 이름은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문에는 도갑사의 창건주 도선국사와 중창주 수미대사의 행장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비 옆에는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용문양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1636년(인조 14)에 시작해서 1653년(효종 4)에 완성되었는데, 도선국사의 행정을 담고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비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광양 옥륭사에 국사의 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비분만이 전합니다.
앞면의 비문 왼쪽의 글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고, 비문 오른쪽의 글은 홍문과부수찬 이수인(李壽仁)이 쓰고, 글씨는 성균관 진사 김시간(金時간)이 썼습니다.
비석 뒷면의 음기는 대부분 도선국사에 관한 내용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다음편엔 월출산 산행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