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5.18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

시누대 2011. 5. 18. 19:48

 

5.18 민주화운동은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

1961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집착하였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우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그칠 줄 모르고 전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후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준비하여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당시 분출되고 있던 전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그 제물이 광주였다.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곳이며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 광주였던 것이다. 그래서 광주는 70년대 박정희 개발 독재 때부터 희생양이었다.

철저히 소외되었고 경제에서는 낙후되었으며 우리 민족을 다시 동서로 가르는 지역감정의 볼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장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투쟁해 온 민주투사의 고장이었다.

전두환 신군부 일당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하였던 것은

정신적 측면에서든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든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민중항쟁은 끝났지만 그 후 청년학생을 비롯한 양심적인 민주인사들과 민중운동에 의해

전두환 일당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움으로서 항쟁의 정당성은 온 천하에 입증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5.18은 광주만의 기념일이 아니다.

전 국민이 이를 가슴깊이 새기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꽃 피워나가야 할 것이다.

 

 

◆ 5.18광주민중항쟁 열흘 간의 상황 일지

 

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피살,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
1979.12.06 10대 대통령에 최규하 선출, 긴급조치 9호 해제
1979.12.12 신군부의 군사반란

1980.04.14 최규하 대통령,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
1980.05.14 광주지역 대학생 등 1만여 명 가두 진출 도청광장에서 민주화 성회 진행
1980.05.15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 시민 20만여 명이 집결해 계엄철폐, 민주화 요구 시위


다음은 5.18기념재단이 밝힌 광주민중항쟁이 전개된 과정.

▲ 1980년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뒤 총검으로 완전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내로 시가행진하며 진입하고 있다. '피의 광주'를 예고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 데일리중앙
5월 17일 (토요일, 맑음)
·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 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5월 18일 (일요일, 맑음)
·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 19시 02분 : 계엄사령부,광주지방 통행금지 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 3시 00분 : 증파된 공수부대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 의해 부상
·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 8시 00분 : 고증학교 휴교조치
·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간의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 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
· 21시 05분 :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 광주MBC건물 방화
· 23시 00분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맑음)
· 0시 35분 :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 2시 18분 : 시외전화 두절
· 4시 00분 :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금 남로에 등장
· 4시 30분 : 광주KBS건물 방화
· 8시 00분 :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20사단 병력과 충돌
· 10시 15분 : 실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교체
· 10시 19분 : 광주세무서건물 전소
· 11시 10분 : 대형헬기, 도청광장에 도착
· 12시 59분 :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려 퍼지면서 공수부대 사격 시작
· 13시 20분 :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 14시 15분 : 도지사, 경찰헬기에서 시위 해산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35분 :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대 획득
· 14시 40분 :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
· 16시 00분 :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대 설치
· 17시 30분 : 공수부대,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 1980년 5월 18일 민주화 요구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의 유혈 진압이 시작되면서 공수부대원이 대학생을 무차별 타격, 공격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 데일리중앙
5월 22일 (목요일, 맑음)
· 9시 00분 :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 군용헬기 공중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 시민수습위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21시 30분 :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맑고 한때 흐림)
· 8시 00분 :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
· 10시 15분 : 학생수습위 자체 특공대 조직하여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오후에 비)
·13시 20분 : 공수부대,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14시 20분 :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전교사부대 간의 오인 총격전 발생
·14시 50분 :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비)
· 11시 00분 :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와 광주항쟁 구호 대책비 1000만원 전달
· 15시 00분 :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 5시 20분 :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8시 00분 :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진입 저지를 위해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시킴.
· 24시 00분 :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

5월 27일 (화요일, 맑음)
· 3시 00분 :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 방송
· 4시 00분 :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4시 10분 :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사격
· 5시 10분 :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작전 종료
· 6시 00분 :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선무 방송
· 7시 00분 :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 도청 인계
· 8시 50분 : 시내전화 통화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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