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귀가 아니예요’ 하고,
조심스럽게 마을에 든다. 못된 귀신 못 들어오게 하는 `날당산’이 버티고 서 있기 때문. 김창헌
정읍 칠보면 원백암마을은 마을지킴이 `12당산’이 곳곳에서 임무수행을 하고 있는 마을. 정월 초사흗날 밤 12시면
금줄 쳐놓고 비밀스럽게 당산제를 올리는 마을이다. 수백 년 전통의 풍습이 그대로 살아있어 마실 오는 외지사람들이
많다. 그 전통마을에 키 큰, 얼굴 방실방실한 해바라기가 피었다더라. 입 벌리며 `이렇게 많이 피어있는 것 첨 봐’
한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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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개울가 너머로 해바라기가 참말로 많이 피었다. |
| 마을지킴이 '12당산'
곳곳에 `날당산’하고 인사 나누자마자 무리 지어 있는 해바라기. 얼굴 붉어질 것 같다. 하나같이 얼굴 내밀어 나를 보고
있다. 관심 가져 준다. 일일이 악수라도 해야 하나? 안녕, 안녕, 안녕 손 흔든다. 한창때다. 환하게 핀 노란
꽃잎들. 간지럽겠다. 복스러운 얼굴 안에 나비들 벌들 정신이 없다. 저쪽 밭에도 이쪽 논에도 노란 얼굴들 합창하듯 피어있다.
남우세스런 남근석 세워져 있다. 그 `현실감’으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나 있다. 그리하여 이 남근석은 당당히
책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으니 민속학자 주강현씨가 쓴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가 그것. 원백암마을 땅모양이 여자의 `음부형국’이라 음양의 조화를
꾀하고자 동구밖에 남근석을 세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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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된 귀신 못 들어오게 지키고 있는 마을 초입 '날당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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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할머니 돌장승' |
|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할머니 돌장승 옆에도 해바라기 방긋하다. 왕방울 눈에 주먹코, 무엇보다 작은 입이 쭈물쭈물해진 할머니 입이다. 스르르 웃음 짓고
있다. 깨 베고 고추 따러 오는, 만나는 마을주민마다 물어본다. `왜 해바라기가 다들 한쪽만 보고
피었대요?’ 역시나 “해 보니라고 그라제”고 가장 많은 답. 그러나 부안 지지포에서 가마 타고 시집왔다는 한 할머니는
다른 말을 내놓는다. “애네들이 시위하는 거여. 작년부터 우리들이 해바라기를 숨궜는디, 애네들이 태어나고 본게 시골이
힘들거든. 근게 `농촌 살려주셔’ 허고 높으신 양반들 사는 디(곳)를 봄씨롱 으싸으싸 허는 거여.” 할머니 말씀 듣고
나서야 이삭 올라오는 벼도 보이고 오랜 장마로 병들어 죽어 가는 고추밭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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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잎은 흔적만 남고 암,수술이 발달한 통꽃에 나비가 날아와 꿀을 빨아먹고
있다. |
| `너는 나의 태양, 난 너의
해바라기! 해바라기가 태양만 바라보듯 나도 너만 바라볼게’. 해바라기가 종일 해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린다는 것이 사실일까?
어린 줄기였을 때는 그런단다. 영양분을 받으려고 아침에는 동쪽 저녁에는 서쪽으로. 그러다 어느 정도 크며 줄기가
굳어져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고. 허나 그래도 태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남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해바라기 꽃은
국화과 꽃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다. 언뜻 보기에 해바라기는 하나의 꽃송이로 보이지만 다 별개의 꽃. 가장자리, 꽃잎으로 보이는
하나하나는 혀꽃(설상화)이며 가운데는 통꽃(관상화)이다. 혀꽃은 암술과 수술이 퇴화해 꽃잎만 남은 것이고 통꽃은 꽃잎은 흔적만 남고 암·수술이
발달한 것. 즉 혀꽃은 화려함으로 벌이나 나비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재밌는 사실은 혀꽃은 태양광선을 받으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은
자외선을 반사시켜 곤충들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 꽃이 피어있으니 얼른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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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당산나무 아래 거북돌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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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를 따가지 오는 할아버지. |
| '효자작물' 되길 바라는
간절함 할머니 당산나무 밑 거북돌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 2년째 짓는 해바라기 농사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피부에
좋고 눈(시력)에 좋고 여자들 생리통에도 좋고 오만 군데 좋다고 하니 척척 팔려나갈 것이다, 참기름은 퐁퐁(세제)으로 씻어야 하지만
해바라기기름은 물로만 씻어도 잘 닦이니까 그것만 알려져도 다들 사갈 것이다, 등등 얘기가 많다. 해바라기 씨앗으로 기름을 짜 내놓고 있지만 아직
판로가 열리지 않았다. 농약 안 하고 일일이 손으로 풀 매 가며 지은 농사 `효자 작물’이 되기만을 바란다. “자꾸
이뻐진단게. 참말이여. 총각남편을 얻든마 이파리 때깔이 달라졌단게.” 그늘 드리우고 있는 할머니 당산나무 얘기다. 몇 년 전에 마을 안에
있는 할아버지 당산나무가 죽었다. 음식 장만하고 의식 갖춰 새 할아버지 당산나무를 모셨다. “어른노릇 혀야한디, 언제
헐라냐 걱정했는디 인물이 훤출허니 잘 났어. 무럭무럭 큰단게. 우리 당산 할매도 맘에 들었는게 자꾸 이뻐진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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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연인이 다시 만나게 해달라며 소원을 비는 '칠석돌당산' |
| 할머니 당산나무 위에는 사탕
하나가 얹어져 있다. 술 한잔을 마셔도 떡을 가지고 와 나눠 먹어도 할머니 당산나무 먼저 드리고 먹는다. 할머니, 할아버지 당산나무 이파리 돋는
것을 보고 그해 풍년을 점치기도 한다. “이파리가 똑같이 나믄 풍년, 밑에는 잘 났는디 욱에가 비실비실하믄 수답(물을
댈 수 있는 아랫논)은 잘 된디 근답(높은 위치에 있는 논)은 모를 못 심어. 골감나무로도 풍년을 따졌는디
죽어불었어.” 할머니들이 앉아서 누워서 쉬고 있는 거북돌도 `12당산’의 하나다.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위해 자손들이
소원을 비는 당산이다. 그런데 한쪽을 누군가 깨서 가져갔다. 줄줄이 정으로 내리친 자국이 있다. 할머니들은 오히려 이 일 저지른 사람 걱정을
한다. “뭔 일이 생겨도 생겼을 건디…” 한다. 마을에 놓인 큰돌은 모두 귀하게 모시고 있다. 건드렸다가는 큰 화를
입는다고 믿고 있고 실제로 그랬다.
“새마을(운동) 헐 때 길 넓힌다고 한
양반이 당산바우를 조금 밀어넣었는디 그 양반 돌아가셔 불었어. 한 양반은 닭장 짓는다고 땅 파갖고 묻어불었는디 닭장 불나 불고 그 양반도
시름시름 앓다가 가셨잖어.” 그래서 이번 당산제를 놓고도 걱정이 늘었다. 정월 초사흗날 밤 12시에 어김없이
당산제를 올렸는데 올해는 오후 4시30분으로 앞당겨졌다. 당산제를 구경하러온 관광객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서였다. 정읍시가 지역축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맨날(매일) 찬물에 목간(목욕)허고 비린 것 안묵고 입마개허고 장만을 허는디, 그 고생하믄서 제사를
지낸디 지대로 혀야 동네 잘 되고 밖에 나간 자식들도 잘될 건디…. 그러게 핀하게(편하게) 지낼라믄 옛날부터 안 지냈제. 쪼금만 잘못혀도 눈
멀어불고 불구가 된다고 혔는디…그러니 걱정이 안돼?” 거북돌당산 아래 칠석돌당산은 사랑하는 연인이 다시
만나게 해달라며 소원을 비는 당산이다. 마을 안 길가에 있는 `행운돌당산’은 소원을 빌면 재물복이 생긴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12당산 찾아 돌며
원백암마을의 수백 년 내려온 신성한 전통을 느껴보자. 밤에 도둑이 마을에 들었다가 밤새 당산 주위만 돌다 물건 내려놓고 도망쳤다는 얘기도 여근석
아래 있는 농바우와 관련된 얘기도 들어보자. 맑은 개울가 너머로는 해바라기가 참말로 많이 피어 있다.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정읍 나들목-태인 방향 1번 국도-북면에서 708번
지방도-원백암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