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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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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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여성에게 느끼는 두 가지 감정은 무엇일까? 원초적 에로틱의 느낌과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로서의 느낌이 아닐까 싶다. 지나치게 이분법적 사고로만 여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대 의견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무도 꽃도 동물도 그러하다. 그건 자연의 지속성에 대한 당연한 이치이며 세상이 존재하는 원리다. 하늘은 빛과 비를 내려 땅을 촉촉이 적시고 생명이 자랄 수 있는 에너지를 주기 때문이며 땅은 그 에너지를 받아 생명들을 키워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근곡을 찾아가는 길목에서 음양의 이치니 여성과 남성의 역할 분담이니 운운하며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은 여근곡에 대한 사람들의 터부가 반반으로 갈린 것에 대한 나름의 해석 때문이었다. 그 모양이 여성의 성기와 흡사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말 그렇네'하고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속칭 '음문골'이라고도 하는 이곳에는 신라 선덕여왕과 연관된 이야기 하나가 전해온다. 사람들이 모여 이상하게 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에게 명했다. 훈련된 정병 2천명을 데리고 속히 서쪽으로 나가서 여근곡이란 곳을 들어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다. 습격하여 잡아라. 각간들이 명령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명씩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 물으니 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신라군은 곧 그들을 사살했다.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남산 고개에 숨었으므로 그도 에워싸 사살했다. 또한 백제의 후속부대에 1천3백명이 오는 것도 모두 죽였다. 신기하게 여긴 군신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개구리를 통해 백제군이 숨어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또한 남근은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 것을 알았다" 라고 대답했다. -이하석 시인의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에서 발췌-
철도 건널목을 통과하자마자 멀리 울퉁불퉁한 산이 보였다. 산맥들이 마치 가랑이를 벌린 듯한 그 먼 발치 가운데에는 정말 여성의 음부처럼 생긴 여근곡이 있었다.
사람 두서넛이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부처못(佛池)이라는 곳 옆에는 '개구리 설화와 여근곡'이라는 푯말과 함께 옥문지를 본떴음을 알 수 있는 석조로 만든 작은 연못이 있고 개구리 형상들이 역시 석조물로 앉아 있다. 그 옆 단층집 옥상은 전망대라고 써있었는데 아마 그곳이 여근곡을 보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집 벽에는 여근곡을 찍어놓은 사진과 설명이 붙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사진 속 여근곡은 바로 앞에서 보는 여근곡보다 훨씬 그 모양이 흡사해 민망할 정도였다. 잎이 지는 나무 탓에 자연스럽게 그 형상을 더욱 뚜렷하게 만드는 가을쯤이나 늦겨울쯤에 찍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누구에겐가 여근곡은 2월경쯤 보면 그 모양이 가장 여근곡답다고 들은 적이 있으니 말이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데 분홍 꽃잎을 내민 복사꽃과 어우러져 아주 야릇한 느낌을 풍겼다. 60년 전 여근곡 옆에 생겼다는 유학사를 찾아 차를 달렸다. 여근곡 중간 도톰하고 불그레한 한복판 아래에 사시사철 물이 난다는 작은 샘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정말 알수록 여성의 그것과 흡사해 얼굴이 불그레해지기까지 하는 여근곡이다. 스님 한 분이 여근곡 샘으로 가는 길을 묻자 "상수원 식수로 쓰기 위해 샘을 막아놔서 가도 볼 수 없다"고 했다. 가뭄이 들어도 끄덕 없이 물이 난다는 여근곡의 샘은 이제 마을 사람들의 상수원이 되어 목마름을 채워내고 있는 것이다.
여근곡이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지만 그 마을사람들은 정월대보름이면 정갈한 제사장을 뽑아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여근곡을 신성시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여근곡 샘을 작대기로 찌르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이 나기 때문에 동제를 통해 예방을 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 때문에 한 때는 외지 남자들의 접근을 막기도 했다고 한다. 또 이곳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묻히는 최고의 명당으로 꼽기도 한다는데 죽어서도 여성과 가까이 있고픈 남성들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옛날에는 몰래 무덤을 쓰기도 하고 그 무덤이 들통 날까봐 일부러 무덤의 봉분을 낮게 썼다고도 한다. 이곳에 남성의 무덤이 들어서면 틀림없이 비가 안 오거나 괴병이 돌았다고 한다. 마을에 이런 변고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은 여근곡으로 가서 몰래 쓴 무덤을 없애기도 했단다. 다른 곳은 다 탔어도 여근곡 샘 주변은 타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음기가 세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옛날 경주 부윤이 부임해 내려오면서 이곳을 지나면 여근곡을 보게 되고 그러면 재수가 없어진다 해서 영천에서 안강으로 가 노팃재를 넘는 먼 길을 돌아 부임했다는 이야기와
6·25 전쟁 당신 국도변을 따라 행군하던 미군들이 여근곡을 보며 탄성과 야유를 지르며 사진을 찍고 야단법석을 떨었다는 이야기는 여근곡을 원초적 에로틱의 시각으로만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건천들의 곡식을 가꾸고 선덕여왕의 이야기에서처럼 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어머니와 같은, 어쩌면 여근곡은 생명의 탄생지인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 많은 무게를 둔다. 실제로 경주와 건천 사이에서 여근곡이 있는 산을 바라보면 마치 임산부가 길게 누워 깍지를 끼고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누워있는 형상처럼 보인다. 여근곡 멀리 늦은 산벚나무가 하얀 치마를 휘날리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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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강*<에로틱하다고? 그곳은 어머니의 자궁이었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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